지근욱: 하드보일드 브리즈
DB Type
Description
2023.08.09 ▶ 202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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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임시의 테 001 Inter-rim 001 2023, Colored pencil on canvas, 160x160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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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임시의 테 004 Inter-rim 004 2023, Mixed media on canvas, 112x194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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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임시의 테 007 Inter-rim 007 2023, Mixed media on canvas, 76x76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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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임시의 테 012 Inter-rim 012 2023, Mixed media on canvas, 35x35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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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상호-파동 004 Inter-wave 004 2023, Mixed media on canvas, 40x40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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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상호-파동 006 Inter-wave 006 2023, Mixed media on canvas, 112x162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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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상호-파동 007 Inter-wave 007 2023, Mixed media on canvas, 80x100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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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상호-파동 011 Inter-wave 011 2023, Mixed media on canvas, 50x50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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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교차-형태 002 Inter-shape 002 2023, Mixed media on canvas, 70x90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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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교차-형태 001 Inter-shape 001 2023, Acrylic and colored pencil on canvas, 45x45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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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교차-형태(충돌기) Inter-shape (Collider) 2023, Mixed media on canvas, Dimensions variable (approx. 230x230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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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교차-형태(복사) Inter-shape (Radiation) 2023, Mixed media on canvas, Dimensions variable (approx. 300x790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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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교차-형태 007 Inter-shape 007 2023, Acrylic and colored pencil on canvas, 70x70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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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진동수 C3 - 015 Frequency C3 - 015 2023, Acrylic and colored pencil on canvas, 50x34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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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진동수 C3 - 017 Frequency C3 - 017 2023, Colored pencil on canvas, 70x70cm @제공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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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하드보일드 브리즈: 단단하게 여울지는
박미란 | 큐레이터지근욱의 화면 위 서로 다른 두 세상이 포개어진다. 연무처럼 모호한 원경의 색채와 또렷이 드러나는 근경의 선분들이 마주 닿는다. 가까웠다 멀어지는 몸의 움직임으로 회화를 본다. 가라앉는 선과 떠오르는 선의 층위는 여럿이었다가 하나가 되고, 뒤엉킬 듯 가지런히 나누어진다. 선분의 영역에 눈을 디딘다. 색연필은 안개 짙은 화면 위를 가로지르며 정제된 선을 거듭 긋는다. 지나가는 손의 그림자 곁에 색색의 파편이 내려앉는다.
선들이 자아내는 환영이 단단하게 여울진다. 지극히 하드보일드한 외양 뒤에 더없이 감정적인 바람을 숨긴 것처럼. 스러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얼어붙지 않을 만큼 유연하게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바람을 생각한다. 다부진 듯 온유한 선, 무정한 듯 세심한 그리기의 시간이 화면에 나란히 축적된다. 엷은 안개를 고운 빗으로 쓰다듬듯이, 그로써 빛을 머금은 공기의 색채를 떠 올리듯이.
색채를 감각하며
한 무리 색채가 화면을 잠식한다. 화폭에 서린 연무는 작가의 그리기를 위하여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채다. 촘촘히 건져올린 색선들이 얼마간 그 배경의 색을 닮았다. 바라봄은 세상의 빛깔 사이 닮음을 깨닫는 과정이다. 모든 장면에 깃든 색조 가운데 다름을 분별해 내는 일이기도 하다. 안개의 속내를 탐구하는 작가의 시선을 가늠해 본다. 매번 낯선 관점으로 다른 빛무리를 건져올리는 연습의 반복을 유념하면서.
(2023) 연작의 화면은 완만하게 구부러진 곡선의 반복을 선보인다. 둥근 호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항성의 거대한 중력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화면마다 주어진 자의 모양이 수평적 파장의 크기를 결정짓는다. 선분은 안개를 화면 아래로 밀어내거나 위로 끌어당기며 수직적 파동의 높낮이를 조율한다. 상상된 중력장 위에 스민 빛들이 안료의 몸을 빌어 화면에 안착한다. 색색의 티끌이 모여 선분이 되고, 또 안개가 된다.
같은 빛이 드리운 개별 화면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의 중첩을 연상시킨다. 뒤편의 자욱한 망점을 보며 선분의 내밀한 부스러기를 상상한다. 전면의 세밀한 선들로부터 우주 속 별들의 성운을 떠올려 본다. 초점의 조율에 따라 안개는 선의 미시세계로, 선은 안개의 거시적 장면으로 탈바꿈한다. 크고 작은 선들은 다채롭게 관계 맺으며 저마다 고유한 화면을 이루어 낸다.
선분을 바라보며
점에서 선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그리기의 처음을 알리는 몸짓이다. 지근욱은 그 최초의 내디딤에 부단히 집중하여 화면을 메워나간다. 선들은 그리는 이의 반복적 수행을 암시하는 한편 보는 이로 하여금 세부의 다름을 대조하도록 만든다. 바라봄의 감각을 변주하는 연습이다. 그림의 중력, 가상의 부피를 고민하는 여정 가운데 낯선 세상과 공명하고자 하는 그만의 방식이다.
(2023) 연작에서 선들은 물결처럼 굽이친다. 회화의 시공간에 작용하는 중력이 실랑이하듯 서로를 밀고 당긴다. 곡선이 안개와 맞닿는 자리마다 시야의 번짐이 생겨난다. 둘 중 무엇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착시다. 하나의 존재와 또 다른 존재의 만남은 세 번째 존재인 관계성을 탄생시킨다. 화면은 바라봄의 거리에 따라 매번 다른 시각 세계를 드러낸다. 바닥 면의 구조는 화면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흐릿해지며 더 멀리 물러날수록 선명해진다.
복수의 캔버스로 구성된 작품들은 서로 간 일정한 간격을 띄운 형태로서 설치된다. 파동은 화면 사이 공백을 유예한 채 이어지는 모양새다. 선과 동행하는 시선은 벽면을 드러내는 여백마다 쉬었다 간다. 보는 이의 감각도 수차례의 구간으로 분배된다.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현실의 공기다. 물성을 지닌 회화는 필연적으로 지금 이곳의 시공간에 거주하며 전시장의 하얀 벽면으로 하여금 보다 특수한 여백이 되도록 한다. 흘러가다 끊어지는 물결의 자리마다 다양한 정서의 백색 소음이 스민다. 눈의 깜박임 사이 끝없이 휘발하는 순간들처럼, 그 찰나에 파고드는 감각들처럼.
화면을 마주하며
회화는 자신이 자리 잡은 공간의 규모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목격된다. 작품이 설치되는 장소의 특성만큼이나 화면 자체의 형태와 면적에 따라서도 바라봄의 경험이 달라진다. (2023) 연작에서 개별 화면은 수직 수평의 직선을 팽팽하게 교차시키며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각각의 캔버스 모양을 다채롭게 변주한 점으로부터 정형화된 사각 틀에서 벗어나고자 한 시도가 돋보인다.
보통의 모양에서 벗어난 캔버스들은 평소와 다른 보기의 방식을 제안한다. (2023)는 열다섯 점 캔버스를 하나의 형태로 조합한 작품이다. 타원형 윤곽에 알맞도록 개별 캔버스의 가장자리를 곡선으로 가공한 후 배열했다. 서로 다른 크기로 휘어진 변의 곡률에 따라서 화면을 대하는 시야의 향방이 유동적으로 변한다. 사각형 화면 위에 그은 곡선이 그림 내부의 율동을 감각하도록 한다면, 둥글게 휜 변형 캔버스 위에 그은 직선은 실재하는 장소와 그림 사이 일어나는 관계의 운율을 상상하도록 돕는다.
(2023)에서는 열여섯 개 사다리꼴 캔버스가 모여 하나의 커다란 팔각형을 이룬다. 개별 화면들은 약속된 위치에 놓임으로써 보다 큰 도형의 일부가 된다. 전체는 늘 부분의 단순한 합 이상의 가능성을 포괄한다. 첫 번째 존재와 두 번째 존재가 만날 때 생성되는 관계의 힘은 언제나 하나의 개체가 지닌 본연의 정체성 너머 새로운 역동성을 일깨운다. 캔버스들이 만들어 낸 팔각 구조의 중심부에서 다시금 팔각형의 여백이 태어난다. 낯선 형태의 화면들은 회화 바깥세상의 벽면에 생경한 빈칸을 만들어낸다. 화면과 화면 사이 기다란 공백들이 현실의 시공에 무언의 선을 새긴다.
몸을 숙여 수평면 위에서 그린 그림은 줄곧 수직 벽면에 오를 내일을 의식한다. 스스로의 내면세계에 응집된 시선을 외부 세상을 대하는 방향으로 일으키는 일이다. 회화의 몸은 그것을 바라보는 몸과 고유하고 내밀하게 관계 맺는다. 지난한 회화의 여정 속에서 선분에 눌러 담은 감정의 색채를 유심히 본다. 올곧은 몸짓이 긋고 간 자리에 남은 색연필 가루의 온난함을, 손으로 그린 회화의 끈기 어린 시간을. 단단하게 여울지는 선분의 세상, 그곳의 울림에 문득 귀 기울인다. 마음은 때로 일렁이고, 때로 가라앉는다.
시각적 환영에서 신체적 가상으로
조경진 |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지근욱의 작업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그건 벡터(사선)와 만곡(곡선)이다. 이 두 요소는 그의 시각 언어를 구성하는 두 핵심 조형 자질이면서, 순전히 형식적인 기준이지만, 그의 작업 전체를 두 계열로 분류할 수 있게 만드는 조형적 기준이다. 간단히 말해, 그의 작업 전체는 벡터가 주요 자질인 것과 만곡이 주요 자질인 것, 이 둘로 구분할 수 있다. 이를테면, (2021) 연작, (2021) 연작, 그리고 이번 전시의 (2023) 연작이나 (2023) 연작은 모두 만곡을 주요 시각 자질로 구성한 것이며, 반면 벡터를 쐐기형이나 지그재그로 배치한 (2021) 연작, 벡터를 방사형 패턴으로 구성한 (2019), (2022) 연작은 모두 작품을 형성하는 주요 자질로 벡터를 사용한다. 물론 조형 언어의 자질은 모든 언어에 내재하지만, 어느 누가 왜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자질을 쓰는지,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는 그 자체로 그의 언어의 특수성을 보장한다.
이 두 자질은 지근욱이 고안한 형태 구성의 문법, 혹은 형성 원리에 따라 각종 반복 패턴이나 형태를 생산한다. 그 문법의 핵심은 반복이고, 반복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서 형성되도록 유도하는 특이성이 존재한다. 그 특이성으로 인해 반복은 이러저러한 형태를 만든다. 이를테면, SF 영화의 특수 효과(빛의 속도로 가속할 때)를 연상시키는 방사형 이미지, 톱니 패턴이나 벡터의 조합으로 구성된 다양한 입체 형태, 파동 형태와 굴곡진 곡면 등이 그것이다. 사실 그의 언어를 형성하는 자질에는 하나가 더 있는데, 그건 우리가 쉽게 밀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벡터와 만곡이 그의 언어를 구성하는 기초 단위라면, 밀도는 이 요소들을 화면에 배치하고 분배할 때 그가 주의 깊게 고려하는 자질이다. 이를테면 방사형 이미지의 경우, 벡터 선들이 모아지는 소실점 근처에서 거의 극한에 이를 정도로 밀도가 높고, 화면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성기다. 만곡의 파동 형태도 마찬가지다. 파동선을 반복해서 그을 때 그가 고도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그 파동선 간의 특정한 간격이고, 그 간격 조절로 인해 밀도의 차이가 생기며, 그 밀도의 차이는 강도의 차이를 낳고, 색채 강도의 차이와 함께 특정한 형태와 공간을 창출한다. 특히 지근욱은 금번 전시의 (2023) 연작에서 자신의 언어의 핵심 문법이 이 밀도와 강도의 차이를 조절하는 것에 있음을 분명하게 자각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이 형태들은 환영(illusion)과 가상(semblance)을 산출한다. 그의 작업에는 환영도 가상도 있다. 환영은 주로 3차원 공간이나 특정한 형태나 형식적 통일성으로 나타난다. 방사형 이미지에서 소실점의 깊이, 크고 작은 벡터의 교차나 응집에서 구(sphere), 쐐기 형태로 엇갈린 벡터 자질에서 3차원 톱니, 만곡의 파동 패턴의 간격 조절에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전체로서 굴곡면이 그것들이다. 이 환영은 이른바 착시를 유발하기에 그의 작업을 옵티컬 아트의 부류에 넣게 한다. 그의 작업이 옵티컬하다는 것은 그저 표면적으로나, 손쉬운 미술사적 분류에서 그렇다는 것뿐이니 옵티컬하다는 것만으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이 환영은 작업의 결과이고 그것이 나타나는 한 방식일 수는 있으나, 그의 작업의 본질도,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도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환영은 우주와 사물의 실재가 양자적인 것, 전일적인 것임에도 우리의 의식에는 질과 연장의 재현적 세계, 이것과 저것이 서로 독자적인 객체성을 갖고 분리된 개별체처럼 보인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그저 기초 자질들의 특정한 배치나 수행의 질서가 이러저러한 형태나 특수한 공간으로 나타날 뿐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데 그친다. 그는 이런 환영을 그것대로 용인한다. 그렇게 보인다고 해도 그것도 우주가 나타나는 방식이니 말이다.
이는 그가 보여주려는 것이 환영이 아니라, 가상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운동, 더 정확히 말하면, 반복의 운동, 이것이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가상이다. 그의 작업에서 환영이 정적이라면, 가상은 언제나 동적이다. 동적인 것은 그 자체로 힘일 수도 있으며, 그 동적 움직임을 낳는 기저의 힘을 가정하게 한다. 어쨌건, 그는 늘 움직이는 세계에 관심을 가져왔다. 무용수의 움직임을 한 순간, 한 공간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보면서도, 그 무용수가 거쳐온 과거의 경로와 나아갈 미래를 함께 본다. 현실화된 현재에 대한 지각과 지나간 과거, 앞으로 올 미래가 하나의 운동의 가상으로 지각된다. 현재의 순간과 가상의 운동이 함께 지각되는 것이다. 지근욱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운동의 가상이 나타난다. 방사형 이미지는 단순히 방사형 패턴이나 깊이가 아니라, 빛의 속도로 무한한 깊이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거나,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그렇게 방출해 오는 운동이다. 쐐기형 패턴도 공간과 형태의 환영을 보게 되더라도 실은 상하좌우나 벡터적인 운동이며, 파동 패턴에서 굴곡면의 환영에서도 파동 패턴의 벡터적 진행이 주는 운동의 가상, 전체 곡면의 출렁거림의 가상이 나타난다. 이것이 그가 초기 작업부터 현재까지 운동을 직접 지칭하거나 관련된 단어들, 이를테면, ‘유동적인(fluxional)’, ‘역동적(dynamic)’, ‘확장하는(expanding)’, ‘경로(path)’, ‘회전하는(spin)’, ‘주파수(frequency)’ 등의 단어를 써 온 이유다.
그에게 환영이나 착시는 내적 질서의 운동이 스스로 어떤 객체적 통일성을 형성하고, 그 질서 잡힌 통일성이 우리 의식에 드러나는 정적 현상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서 환영만을 보고 가상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그의 작업의 반만 보는 꼴이다. 실제로, 그는 이 운동의 가상을 구현하기 위해 작업의 모든 세부를 세심하게 조작하고 연출한다. 기계적으로 산출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모든 선은 작가의 실제 수행과 동작으로 일일이 만들어진다. 이를테면 연작에서 쐐기형으로 조합된 두 벡터는 끝점이 정확히 맞물리는 것도 있지만, 다양한 간격을 두고 대부분 미세하게 어긋난다. 그뿐 아니라 이런 어긋남은 다른 길이, 다른 색채의 배열에 의해 더 강화된다. 거시적으로는 규칙적 반복처럼 보이는 현상에 내재한 불규칙성과 그로 인한 유동성의 감각은 전체 작업을 단순히 통일적 형태의 환영이 아니라, 쐐기 패턴을 따라 유동하는 운동의 가상으로 만든다. 이런 방식은 초기의 방사형 작업, 2019년부터 출현한 만곡 작업, 연작, 금번 전시에 나온 유려한 만곡 작업, 연작에서도 공통의 제작 방식으로 쓰였다. 거시적인 수준에서 규칙적 패턴은 형태에 프래그난츠(pragnanz)를 부여하지만, 반면 미시적인 수준에서 형태나 색채를 불규칙하게 미분화하고 분절하는 방식은 그가 전체 형태를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운동의 가상으로 만들기 위해 택한 기술적 수단이다.
그의 작업을 볼 때면 곧바로 알아채지만, 이 운동의 가상에는 반복이 있다. 차이의 반복의 운동이라는 가상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단순한 조형 자질과 요소의 반복,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미분화된 차이의 반복, 차이의 반복을 유도하는(혹은 태어나는) 단순하지만 특정한 질서와 원리, 반복 스스로의 운동, 그러한 반복 운동에서 창발하는 통일된 전체와 형태. 이것이 실상 지근욱이 자신의 작업에서 행하고 있는 일이다. 그는 우선 차이의 반복을 신체적 쥬이상스(jouissance)로 향유한다. 지리한 신체적 노동의 반복, 반복 그 자체를 감당하지 못하면 작업은 도저히 나올 수 없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서 반복은 추상적 개념의 반복,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행위와 수행의 반복이고, 실제 시간 속에서 무엇인가가 진행되는 반복이다. 그의 작업의 조형적 요소와 어휘들은 이 수행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반복은 전혀 수학적이지도 기계적이지도 않다. 반복은 실제적이다. 반복의 운동에서 단 하나의 규칙이나 원리만 있다면 거기서 무엇인가 생겨난다는 사실, 이것이 지근욱이 오랫동안 매료되어 온 진실이다. 그는 이 단순한 진리에서 우주의 비밀을 엿본다. 들뢰즈가 설파했듯, 반복은 동일한 것의 개념적 반복이 아니다. 반복은 그 자체로 수축과 종합의 운동이고, 그 자체로 차이의 운동, 차이 발생의 운동이다. 반복이야말로 차이의 반복이고, 차이의 역동적 발생이다. 그의 운동의 가상은 여지 없이 이런 류의 반복이다. 예컨대 연작은 크게 보면 매우 단순한 형태지만, 그 안의 그라데이션으로 표현되는 밀도와 색채의 변화에서 오는 강도의 미분화된 차이의 반복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보이는 운동, 회전, 너울 등 가늠할 수 없이 거대한 운동의 가상을 만든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가상은 중대한 변화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기 작업에서 운동의 가상이 다소 시각적이었다면, 이번 전시의 에서 가상은 시각적이라기보다 신체적인 것, 혹은 정동적인 것이 됐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거대한 아크 형태와 관객의 전체론적 관계로 통합하는, 리처드 세라 조각의 회화적 버전인 것처럼 보인다. 기존의 작업에서 가상은 소용돌이 패턴을 우리 눈이 쫓아갈 때 생기는 운동과 유사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 운동은 눈에 의존하고 한정되는 것이었다면, 이번 작업은 우리의 신체를 직접 작업의 중력장 안으로 끌어들여 우리 자신의 신체를 너울거리게 만드는 효과를 자아낸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우리는 그의 작업에서 우리 자신의 신체가 그림의 파동적 장에 직접 영향을 받는 것처럼 느끼고, 동시에 어떤 공명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다른 작업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이 작업은 직접 몸으로 체감해야 한다. 그 가상은 그래서 신체적 가상이다. 제한적 눈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관여하고, 몸으로 체험되는 가상이다. 우리는 그림 앞에서 마치 바다에 뛰어들 듯, 반대로 말해 바다가 우리를 감싸 안듯 그림의 출렁거림에 몸을 맡길 수 있다. 그렇게 파동과 공명하는 순간 그림과 우리와의 경계는 사라지고, 나와 그림에서 안-사이(in-between)가 발생하며, 곧 정동을 활성화한다. 그의 작업이 언제나 반복의 수행성과 분리되지 않는 덕에, 거기엔 항상 그가 있었다. 반복의 리듬은 그의 눈과 신체의 운동 범위 안에서 그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 리듬에서 출현한다. 그는 자신의 리듬을 그림에 체화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관객마저 하나의 전일적 세계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의 작업은 그의 신체적 수행에서 시작되어 관객이 작품과 공명하면서 완성된다.
모든 면에서, 기초 단위인 자질에서건, 형태적 어휘나 형식적 구조에서도, 수행과 제작의 방식이나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 그 모두에서 그의 언어는 우리 시대의 것이다.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적 세계는 우주의 기본 단위로 독자적 개체를 전제하고, 이 개체는 뉴턴의 절대적 시간과 공간 안에서 움직이며, 세계는 그들의 인과 작용으로 설명된다. 그리드 좌표계는 바로 그런 세계를 수학적으로 처리하는 최적의 모델이며, 캔버스를 회화적 그리드로 전제하는, 모더니즘 형식주의 회화는 근대성의 언어적 시금석이었다. 그 누구보다 몬드리안의 연역적, 환원적 추상은 그런 언어를 대표한다. 벡터와 만곡, 그리고 강도와 밀도의 조절만으로 만들어진 지근욱의 작업은 근대적 체계와 완전히 결별하고, 내재적 질서로서 홀로그래픽 전체성(Bohm), 차이 생성(Deleuze), 과정(Whitehead)의 세계에 밀착한다. 운동의 가상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회화적 형식은 형식적 연역과는 무관하며, 캔버스 프레임은 단지 물리적 장소의 제약일 가상으로서 회화적 장(field)은 회화 밖으로 무한하게 열려 있다. 일견 수직선으로 만들어져 벡터와 만곡의 규칙을 어긴 것처럼 보이는 연작도 그 문법적 핵심은 밀도와 강도의 조절, 그리고 그 차이가 만드는 공간적 진동에 있다. 강도는 그 자체로 차이이며, 다른 모든 강도적 차이를 자신 안에 내재하기에 하나의 강도는 내향적 펼쳐짐의 내재적 질서를 따른다. 이 내재적 질서 안에서는 외향의 재현적 세계도 결국 내적 질서의 외적 펼쳐짐이고, 외적 세계는 무한히 내적으로 펼쳐진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적(holographic) 세계이다. 만곡 패턴의 파동, 즉 즉자적 진동이건, 밀도와 강도의 진동이건 그가 바라보고 구성하는 세계는 양자역학이 제시하는 이 홀로그래픽 세계와 맞닿아 있다. 그 세계에서 하나의 전체로서 우주는 에너지의 장이며, 그 에너지의 국지적 파동과 흥분, 집중과 확산은 시간, 공간, 물질적 개체를 창발한다. 이것이 그의 작업에서 부분적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이유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하나의 파동, 하나의 운동, 하나의 가상, 결과적으로 하나의 전체로 주어진다.
이번 전시의 연작에서 ‘inter’는 두 별개의 파동이나 그 상호 작용을 강조하기 위함이 전혀 아닐 것이다. 근대적 세계가 ‘사이’를 비어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면, 양자장의 세계에서 그것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에너지가 덜 응집되고 덜 흥분된 상태일 뿐이다. 비어 있지 않기에, 사이는 오히려 토대이자 바탕이다. 그래서 그 개념은 버라드(Barad)의 ‘intra’라는 말에 더 가깝다. 파도와 파도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원래 하나의 전체로서 바다가 있다. 설사 상호작용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그 작용은 바다 안에 있다. 그의 작업에서 두 파동은 서로 간섭하고 회절함에도 파도가 하나의 바다 안에 있듯이, 여전히 하나의 전체로서 장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로 너울댄다. 신체적 가상은 작가, 그림, 우리 자신의 파동이 하나의 전체로 공명하고 출렁거릴 때 느껴지는 고유 감각일 것이다.
전시제목지근욱: 하드보일드 브리즈
전시기간2023.08.09(수) - 2023.09.13(수)
참여작가
지근욱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일,월요일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학고재 Gallery Hakgojae (서울 종로구 삼청로 50 (소격동, 학고재) 학고재 신관 및 학고재 오룸)
연락처02-720-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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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in This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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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Ji Keunwook)
1985년 서울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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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re
Style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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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ed
Opening - Closing Date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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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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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